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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 2016년 10월 23일 페이스북 포스팅

 

가설. 유학 생활이 '내' 정신을 어떻게 재편할까?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나는 오로지 한국에서만 공부했다. 따라서 20대 중반 무렵에 이국으로 떠난 청춘들이 무엇을 겪었는지는 다만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나의 추측은 '언어'를 중심에 놓는 학문 분야에 국한된다. 곧 literature(문필)가 핵심이 되는 분야, 문학이나 철학 등이 그 대상이다.

사실 유학을 갈 정도라면 나름 해당 분야에서 내노라할 능력을 보유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유학 길에 오르면, 가장 먼저 짓누르는 것이 언어의 무게이다. 생활(생존)에도 교습에도 꼭 필요한 수단인 해당 외국어. 물론 한국에서 열심히 언어를 익혔겠지만, 원어민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이 지점에서 매일매일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난 바보 아닌가, 말도 못하다니"라는 압박이다. 한국어로는 능숙능란하게 자기 의견과 주장을 펼칠 수 있었는데, 이 외국어로는 다 표현이 안 된다. 생각은 앞서 가는데, 소통은 자꾸 막힌다.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편차가 있겠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대략 해당 언어를 따라잡을 수 있게 된다. 이게 안 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아무튼 나는 그 사이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무척 궁금하다. 아마도 정신의 재편이 일어날 것 같다.

좌절감과 자괴감을 일정 시간 겪게 되면 그것이 자아의 일부가 되기 마련이다. 그게 '습관'의 문제다. 일정 회수가 반복되면 자연스레 습관이 만들어지는 법. 나는 이 와중에 만들어진 습관이 좋지 않은 경향성을 띠게 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가령 열등감. 능력의 차이에 대한 반복된 확인만큼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일은 없다. 그리고 이 때 겪은 일들이 자아의 일부로 형성된 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길에 오른다. 이 경우 한국 대학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섰을 때 (즉 교수로 취직했을 때) 어떤 태도로 자기 전공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될까? 자신의 최종 학위 수여국이 어떤 무게로 다가올까?

더 오래 전, 유학이 드물었던 시절에는 아마 이런 경향이 더 강했을 것 같다. 당시 한국은 확실히 후진국이었으니, 젊은 나이에 문화 충격도 상당했을 거고. 이런 사정 아래서 20세기 후반(전반에 대립되는)의 한국 대학 제도가 정착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부분이 한국에서 학문이 독립하지 못한 채 종속적인 경향을 보이게 된 원인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가설을 세워 본다. 자신의 학술 활동을 해당 언어라는 족쇄에 가두었으니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술 활동을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이런 가설은 과거를 향해 있다. 지금은 분명 완전히 다른 학술 행위가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미래를 향한 말도 보태야 마땅하리라. 나는 이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고 싶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유학 생활이 정신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아니었는지, 물어보고 싶을 따름이다.

아울러 유학을 가지 않았다거나, 이른바 "전통" 학문을 한국 내에서 수련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자유로운 학술 행위를 하고 있다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그런 류의 "국수주의자"를 너무 많이 보았다. 이른바 "우리 것"을 말하려고 하는 이들 중에 그 정체 모호한 "우리 것"이건 괴물 같은 모습을 한 "서구의 것"이건 제대로 공부하고서 말한 이를 못 보았다(김용옥 같은 이가 대표적이라고 본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서양 것을 절대 따라잡을 수 없으니 뭐라도 저들이 모르고 신기해 하는 동양 것을 저들에게 들이밀어 승부해야 한다는 저 철두철미 노예들은 애시당초 고려하지도 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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