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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세계 속의 삶 외장 기억과 인간 기억

철학자 2017.07.17 18:37 조회 수 : 272

뭣 좀 조사하다가 장대익 박사의 아래와 같은 글을 읽게 되었다. 

 

"외장 메모리(예를 들어 usb)와 인간의 기억을 비교해 보자. 외장 메모리의 상태 또는 과정이 인간의 뇌 속에서 벌어지는 기억하기 과정(remembering process)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뇌는 탄소로 되어 있지만 외장 메모리는 실리콘으로 되어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리고 계산 과정이 일어나는 추상화 수준에서 공히 튜링 기계(Turing machine)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아니다. / 외장 메모리와 인간의 기억 과정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인간의 기억 과정은 진화와 발생 과정의 산물로서 그 자체가 수많은 유관 정보들의 총합인 반면, usb와 같은 외장 메모리에는 그런 식의 배경 정보들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둘의 기능은 유사할 수 있지만, 그 기능이 수행되는 맥락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뇌를 넘어서? - 체화된 마음 이론에 대한 비판 (뇌 속의 인간 인간 속의 뇌, 2010. 3. 26., 바다출판사))

 

핵심 논점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1) 외장 메모리와 인간의 기억은 "기능은 유사할 수 있지만, 그 기능이 수행되는 맥락은 전혀 다르다". 2) "인간의 기억 과정은 진화와 발생 과정의 산물로서 그 자체가 수많은 유관 정보들의 총합인 반면, usb와 같은 외장 메모리에는 그런 식의 배경 정보들이 전혀 없"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3) "계산 과정이 일어나는 추상화 수준에서 공히 튜링 기계(Turing machine)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유사점이다.

 

나는 묻고 싶다. 외장 기억과 인간 기억은 과연 '기억'이라는 같은 유 아래에 있는 걸까? 그 둘은 '기억'이라는 명칭만 공유할 뿐 본성이 전혀 다른 게 아닐까? 최소한 '입력 -> 저장 -> 출력'이라는 과정만 놓고 보더라도, 외장 기억과 인간 기억은 너무나도 다르다. 아마도 외장 기억을 인간 기억의 유비로서 '기억'이라고 지칭한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는 최소한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대화가 문자(grammata)에 이르자, 테우트가 이렇게 말했다네. “왕이여, 이런 배움은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지혜롭게 하고 기억력을 높여 줄(mnēmonikoterous)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과 지혜의 묘약(mnēmēs kai sophias pharmakon)으로 발명된 것이니까요.” 그러자 타무스가 이렇게 대꾸했네. “기술이 뛰어난 테우트여, 기술에 속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들이 사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손해와 이익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법이오. 이제, 그대는 문자의 아버지로서 그것들에 대해 선의를 품고 있기에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을 말했소.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을 배운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에 무관심하게 해서 그들의 영혼 속에 망각(lēthē)을 낳을 것이니, 그들은 글쓰기(graphē)에 대한 믿음 탓에 바깥에서 오는 낯선 흔적들(exothen hyp’ allotriōn typōn)에 의존할 뿐 안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힘을 빌려 상기하지(anamimnēiskomenous) 않기 때문이오. 그러니 당신이 발명한 것은 기억의 묘약이 아니라 상기의 묘약(hypomnēseōs pharmakon)이지요."(플라톤, 파이드로스, 274e4-275a6, 조대호 옮김)

 

이 구절에서 플라톤이 비판하는 건, 문자(외장 기억)가 결국 인간에게 기억력을 빼앗고 망각을 촉발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데리다도 지적한 바 있듯이 오히려 인간 기억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외장 기억이며, 그런 점에서 인간 기억은 변화무쌍하고 휘발성도 강하다. 인간 기억이 왜 이런 특성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진화의 역사만이 알려줄 수 있겠지만, 외장 기억과 인간 기억의 본성의 차이, 나아가 전자에 대한 후자의 의존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장대익의 언급에서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외장 기억과 인간 기억은 기능이 전혀 다르다는 것, 인간의 마음의 작용을 튜링 기계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하나 더 언급하기로 하자. 장대익은 위의 언급에 이어 곧바로 가상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C씨는 D씨를 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고소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D씨가 C씨의 외장 메모리를 밟아 손상시켰고, 그로 인해 C씨의 중요한 기억 일부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 이는 마치 교통사고를 당해 뇌손상이 일어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과 똑같은 경우이므로, D씨는 외장 메모리에 대한 손해 배상뿐만 아니라 형사상의 책임도 져야 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만일 뇌와 외장 메모리가 동일한 인지 과정에 의해 작동하며, 더 나아가 동일한 종류의 인지 체계라고 한다면, 뇌 손상과 외장 메모리의 파괴도 물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동일한 효과를 낳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직관은 너무도 명확히 이런 결론을 거부한다.

 

나는 이 논의를 잘 따라가지 못했다. 최소한 저 에피소드에서 '외장 메모리의 손상'이 "뇌손상이 일어나 기억상실증이 걸린 것"과 똑같은 건 아니더라도 "형사상의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결론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을까? 물론 책임져야 하는 이유는 "뇌손상"이 아니라 치명적인 '기억 손상' 때문이지만. 따라서 결론 문장의 전제, 즉 "만일 ~한다면"은 내 판단에는 거짓이며, 따라서 결론 문장의 결론부는 이 문장 내에서는 논의할 가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만, 때로는 뇌 손상보다도 외장 메모리의 파괴가 더 큰 윤리적, 사법적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이라고 본다.

 

내가 사소한 걸 너무 부풀려 생각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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